미술기행 (4)

시대의 얼굴, 셰익스피어에서 에드 시런까지

국립중앙박물관 특별전시실(서울특별시 용산구 서빙고동 서빙고로 137) 2021.4.29 - 8.15

유럽 곳곳에 있는 유명한 미술관이나 박물관에 가면 역사적 인물의 멋들어진 초상화를 쉽게 찾아볼 수 있다. 하지만 전시장에 들어선 초반에는 탁월한 얼굴 묘사와 화려한 액자에 놀라다가도 그림을 몇 점 보고 나면 금세 지루해지기 일쑤였다. 왜냐하면 옛 초상화는 궁정화가에 의해 그려진 정형화된 화법이 많은데 인상주의나 현대미술에 관심이 많은 나에게는 그다지 재미가 없었기 때문이다. 당대에 유명했다고는 해도, 나에게는 화가의 이름이 익숙한 것도 아니며 그려진 사람이 누구인지, 어떤 이야기를 담고 있는지 등 그림 내면의 이야기가 부족해 보였기 때문이다. 그러한 이유로 런던 유학 시절에도 국립 초상화 박물관보다는 테이트 모던이나 여타 유명한 현대미술관에 더 많이 갔다. 이따금 테이트 브리튼 (Tate Britain) 미술관에 가서 고전적인 그림을 보기는 했으나 전시장 안에서 발걸음이 빨라지는 건 어쩔 수가 없었다. 영국과 환경이 다른 우리나라에서, 그것도 국립중앙박물관에서 영국 초상화전을 한다고 하길래 과연 지금까지와는 다른 경험을 할 수 있을까 생각해서 가봤더니 이전 나의 기억들과는 다르게 그림들이 ‘시대’가 아닌 ‘주제’로 묶여있었다. 전시는 총 5개의 주제 <명성, 권력, 사랑과 상실, 혁신, 정체성>으로 구성되어 있다.


윌리엄 셰익스피어 존 테일러 (John Taylor), 1600~1610년 경, 캔버스에 유채

전시의 첫 번째 장은 초상화와 ‘명성’에 관한 것이었다. 아무래도 당시 초상화 모델이라고 하면 어느 정도 유명했을 거고 어떤 성취가 있었기 때문에 화가들이 그렸을 것이다. 전시설명문에 따르면, 영국 국립초상화미술관 설립자들은 ‘명성의 전당’을 꿈꿨으며 그림 주인공의 명성이 작품의 예술적 성취나 화가의 위대함에 우선하는 가치였다고 한다. 흥미로운 건 그들이 가장 먼저 입수한 작품이 윌리엄 셰익스피어의 초상화였다는 것이다. 왕족 혹은 귀족이 아니라, 본인의 탁월한 능력으로 세상에 이름을 떨친 인물을 우선시했다는 점, 그리고 이들을 모아놓아 자국 문화를 기념하려고 했던 게 초상화미술관의 설립 취지라고 생각했다.


에드 시런 콜린 데이비슨 (Colin H Davidson), 2016, 린넨에 유채

에드 시런은 영국 가수인데 한국에서는 <Shape of you>라는 곡으로 잘 알려져 있다. 셰익스피어에서부터 에드 시런까지, 시대의 흐름에 따른 문화의 새로운 아이콘을 포함하려는 영국 초상화미술관의 노력이 담겨있는 듯하다. 개인적으로 동시대인을 옛 초상화 형식으로 그린 작품은 자주 접해본 적이 없어서 이 그림은 특히 흥미로웠다. 푸른빛으로 맑게 그려진 에드 시런의 눈과 유자빛 수염이 적절히 잘 어울렸고, 진지한 표정에서 그의 음악적 고민을 읽어낼 수 있었다.


찰스 1세 헤릿 반 혼트호르스트 (Gerard van Honthorst), 1628, 캔버스에 유채

이 작품은 2장, 권력에 관한 초상화이다. 설명을 보기 전에는 유명한 작가나 그냥 귀족이라고 생각했는데 알고 보니 잉글랜드를 통치했던 찰스 1세 국왕이었다. 왕족이라 하면 일반적으로 눈빛이 강렬하거나 위엄있게 보이려고 배경을 어둡게 하고 온갖 반짝이는 액세서리와 장치로 권력과 그 분위기를 표현하는 작품이 많은데, 이와는 대조적으로 국왕이 일상적인 느낌과 부드러운 모습으로 그려졌다는 게 놀라웠다. 그림을 자세히 보면 피부 결, 머리카락, 눈빛, 손가락의 붓칠이 아기 다루듯 섬세하게 남아있다. 하지만 당대 최고의 화가에 의해 그려졌다는 점과 흔히 볼 수 없는 고급스러운 옷을 입고 있다는 점이 찰스 1세의 권위를 나타내는 듯하다.


애나 윈터 알렉스 카츠 (Alex Katz), 2009, 린넨에 유채

애나 윈터는 영화 <악마는 프라다를 입는다>의 실제 주인공이자, 미국 잡지 <보그>의 편집장이다. 저명한 미국의 화가 알렉스 카츠에 의해 독특한 표현 양식으로 그려진 애나 윈터의 초상화는 패션계 안에서 그녀의 권력과 능력의 우수함을 내비치는 것 같다. 따뜻하면서도 강한 노란색 배경 안의 애나 윈터는 건조하면서도 나긋한 미소를 짓고 있다. 크게 화려할 것 없이 단아한 목걸이와 의상을 걸치고 있지만 애나 윈터의 당당함과 개성이 돋보이는 작품이다.


자하 하디드 마이클 크레이그 마틴(Michael Craig-Martin), 2008년, 통합 소프트웨어가 설치된 벽걸이 LCD 스크린

사진 발명 이후로 정확하게 인물을 묘사해야 한다는 틀에서 벗어나게 된 화가들은 초상화에 인물의 외적인 것보다 내적인 것, 본질에 더 다가갈 기회를 얻었다. 더욱이 예술가들은 사실적으로 그리는 것만이 아니라, 판화, 조소 등 여러 가지 방식으로 인물의 초상을 제작할 수 있게 되었다. 위 작품은 네 번째 주제, ‘혁신, 진화하는 초상화’에 걸린 영국 개념 미술 작가 마이클 크레이그 마틴의 작품이다. 모델이 된 자하 하디드는 곡선의 여왕이라 일컬어지는 이라크 출신 건축가다. 그녀는 서울 동대문 디자인 플라자를 설계했고 홍콩, 영국, 미국 등 전 세계 곳곳에 기하학적인 곡선형 건축물을 설계했다. 자하 하디드의 끊임없이 변화를 추구하는 모습과 유동적 형태의 건축물 특징에 영감을 받은 마이클 크레이그 마틴은 LCD 모니터를 캔버스 삼고 컴퓨터 소프트웨어를 이용해 자하 하디드의 창의적 면모를 표현하였다. 예컨대, 작품에서 고정된 선(드로잉)을 제외하고, 색상은 프로그램에 의해서 무작위로 선택되고 계속해서 바뀐다. 사진을 찍는 순간에도 미묘하게 색이 바뀌어서 흥미로웠다.


찰리와 함께한 자화상 데이비드 호크니(David Hockney), 2005, 캔버스에 유채

전시의 다섯 번째 주제는 ‘정체성과 자화상’이다. 데이비드 호크니는 영국에서 손꼽히는 현대 미술가다. 페인팅 이외에도 판화, 디지털화 등 여러 가지 방면으로 작업을 하고 있다. 서울시립미술관(2019)에서 ‘데이비드 호크니’ 전시 개최를 계기로 한국에서도 팬층이 두둑해졌다. 거의 실제 크기로 제작된 이 작품에는 호크니와 그의 큐레이터 친구 찰스 데어가 같이 등장한다. 맨 뒤에 있는 인물, 중간에서 약간 앞에 있는 호크니, 그리고 맨 앞의 대형 캔버스가 말하듯, 세로로 된 긴 그림에서 원근감과 그의 생기 넘치는 색상 선택, 그리고 재치 있는 인물 표현이 두드러진다. 필자는 호크니의 생동감 넘치는 표정이 공감 가는데, 그 이유는 나도 그림을 그릴 때 보통 눈동자만 살짝 움직이고 입은 꾹 다문 채로 그리기 때문이다. 과거의 내가 자화상을 그릴 때는 카메라로 찍은 후에 그걸 재현하는 방식이었는데, 호크니는 거울을 보며 바로바로 그려내는 방식이라 순간순간의 생동감이 느껴져서 재미있다.

전시를 보기 전에는 ‘아, 이거 런던에 있는 흔해 빠진 초상화 전시 아닌가?’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이 전시에서는 작품들을 다섯 가지 큰 주제의 흐름에 맞춰 감상할 수 있어 좋았다. 또한 그림마다 인물에 대한 설명과 의의를 덧붙여 놔서 그림을 이해하는데 매우 도움이 되었다. 결과적으로는 지금까지와는 다른, 더 정성이 들어간 초상화 전시를 경험했던 것 같다. 전시장에는 역사적 인물뿐만 아니라 알렉스 카츠, 데이비드 호크니 등 현대미술가의 작품도 포함되어 있어서 너무 지루하지도, 따라가기 힘들지도 않았다. 작품전시는 국립중앙박물관에서 8월 15일까지 열리고 전시실 바로 옆에는 관련 굿즈와 서적을 판매하고 있어서 시간 내어 간다면 재미있고 알찬 경험을 할 수 있을 것이다.

출처: 신수안의 미술기행(4) - 포스트24 - http://www.post24.kr/1605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