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술기행(11)

<내일전 : Drag and Draw>

소마미술관 (서울 송파구 올림픽로 424)

2021.08.13-2022.2.26

새해를 맞이해서 올림픽 공원에 있는 소마미술관에 다녀왔다. 소마(SOMA)미술관은 서울 올림픽 뮤지엄 오브 아트(Seoul Olympic Museum of Art)의 약자로, 국민체육진흥공단에서 2004년 9월 개관한 대중 지향적 문화예술공간이다. 이 미술관은 2006년에 드로잉 전문기관을 개관한 이래로 젊은 작가들의 다양하고 실험적인 작품을 보여주고 있다. 현재는 소마드로잉센터 등록작가 10인의 작품을 소개하는 <내일전_Drag and Draw>라는 드로잉 전시가 열리고 있다.

흔히 우리는 드로잉을 스케치북에 연필로 가볍게 그리는 것으로 알고 있다. 하지만 이러한 형태는 드로잉의 근본적 개념에서 파생되어 나온 방법 중 하나일 뿐이다. 드로잉이란 사람의 가장 원초적인 예술수단으로써 개인의 사고와 의식, 그리고 창작 행위를 온전히 드러내는 매체다. <내일전>은 드로잉의 이런 근본적 의미에서부터 시작하여, 다양한 모습으로 확장되는 동시대 젊은 작가들의 작품을 소개하고 있다. 스케치북에 생각과 사고를 연필로 그려낸 일차원적 방식이라기보다는, 작가가 공간 자체를 종이 삼아 본인만의 조형세계를 만들어 나가는 형식이다. 그래서 관람객들이 전시장에 처음 가면 ‘이게 내가 알던 드로잉이 맞나?’ 하며 당황할 수도 있다. 하지만 작가들이 다루는 매체와 주제가 각자 다르고 개성이 있어 작품을 감상하는 재미가 있다. 이 전시를 볼 때에는 ‘다양한 형태로 확장되는’ 드로잉의 개념을 염두에 두고 봐야 한다는 게 포인트다.


드로잉 박스

이 드로잉 상자 안에 있는 작품들은 현재 우리나라에서 주목받는 동시대 미술작가들의 드로잉을 수집한 것이다. 이 공간이 재미있는 이유는, 작품을 안전하게 보관하기 위해 만든 나무 상자 안에 각 미술품이 들어있는 채로 전시되기 때문이다. 박스의 앞, 윗면에 껴있는 투명 아크릴판은 공간과 작품의 조화를 위해 개조된 것으로, 전시가 끝나면 다시 나무판으로 갈아 끼워 보관된다. 수집된 작품 자체에 초점을 두기보다는 그림들이 나무박스에 담겨 새로운 공간과 조화가 이뤄지는 것에 집중해 감상하기를 추천한다. 소마미술관은 앞으로 해당 박스들을 여러 전시장에 설치해보며 작품의 ‘과정’과 ‘실험적’ 면모를 찾아 나갈 예정이라고 한다.


류정민, <아인 슈타인: 생각의 생각 #F01>,

자석, 피그먼트 프린트, 스티로폼, 입체 포토 꼴라주,

125x130x123cm, 2018

류정민 작가가 채운 공간은 흔히 우리가 상식이라고 생각하는 것을 완전히 뒤집어 버리는 듯하다. 예를 들면 중력이나 만유인력 등 현재까지 과학적 사실이라고 믿어왔던 것들 말이다. 사진에서처럼 크고 긴 돌이 작은 돌보다 위에 설치되어 있어 마치 작은 돌들이 큰 돌을 받치고 있는 것 같다. 게다가 사진에는 없지만, 매우 큰 구모양 돌이 천장에 대롱대롱 달려있어 위태로워 보이는데도 떨어지지 않아 중력을 뒤집는 것 같다. 또한, 일반적으로 돌이 자석에 붙는 성질을 갖고 있지 않다는 점을 미루어 볼 때, 스티로폼으로 만들어진 돌이 검은색 자석에 찰싹 붙어있다는 점도 특이하다. 겉으로는 무거워 보이고 부피가 큰 것에 비해 류정민 작가의 돌 무게는 매우 가볍다는 것이 특징이다.

이렇듯 이 작가의 작품은 전 세계 사람들에게 오랫동안 ‘진리’라고 여겨지던 것들을 뒤죽박죽 설정해놓은 것 같다. 이게 어떤 생각에서 흘러나온 건지, 그리고 그 생각이 어떻게 탐구 및 발전되어 이러한 씬을 구성하게 된 건지 궁금증을 불러일으킨다.


배성희, <정원>, 혼합재료, 가변설치, 2017

배성희 작가의 작품은 나목들이 일정한 간격을 두고 하나하나 세워져 있는 모습을 보여준다. 마치 두피에서 머리카락 뿌리가 올라온 것처럼 보이는 이 작품은 앙상하고 기계적인 정원을 보여주고 있다. 일반적으로 정원은 도시의 빽빽한 건물 사이 혹은 집 마당 한편에 자리 잡고 있어 지친 정신과 육체를 쉬게 하는 공간이다. 우리에게 휴식을 선사하는 정원이 배성희 작가에게는 황량한 형태로 비추어진 걸까. 어떤 경험들이 계기가 되었을지 궁금하다.

한편, 나무를 표현하는 데 투명필름이 사용되었다는 것이 흥미롭다. 보통은 뿌리를 땅에 깊게 박고 비바람과 눈에도 올곧게 근본을 유지하는 게 나무인데, 배성희 작가의 나무는 슉! 바람이 살짝 스쳐도 쓰러질 것 같기 때문이다. 그리고 나무들이 도시 가로수처럼 가지치기가 돼 있다는 것이 특징이다. 이는 나무들이 자연 숲에서 보는 것들과 달리 우리가 사는 아파트같이 서로 비슷비슷한 형태를 지니고 있어 매우 질서정연하게 보인다. 이렇듯 가냘프고 부자연스러운 흑백의 정원은 생각할 거리가 많아 재미있었다.

심아빈, <시계 방향으로>, 시계, 40×40×4.8cm, 2016

심아빈 작가의 이 작품을 시계 방향대로 읽으면 ‘이또한지나가리라’가 된다. 작품 제목을 몰랐을 때에는 ‘또,라,이’밖에 안 보여서 웃어넘길 뻔했는데 알고 보니 인생의 진리가 담겨있는 작품이었다. 무슨 일이든 ‘이 또한 지나가리라’라는 마인드를 갖고 임한다면 언젠가는 마칠 것이며, 후에는 꿀 같은 휴식이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이 작품은 간단하게 보이지만 삶에서 중요한 인내심, 평정심 등을 유희적이고 정적으로 담아내면서, 삶의 풍파를 맞닥뜨릴 때 해결하는 방법을 암시하는 듯하다. 무엇보다 시계라는 일상적 물건을 작품의 소재로 삼아 그 속에 철학을 담았다는 게 가장 신선하다.

런던 캠버웰예술대학교 석사과정에 다녔을 때 페인팅, 조소, 사진 외에 드로잉 전공이 있어서 살짝 놀랐다. 왜냐하면, 당시 나는 드로잉이란 작가가 본인 생각을 손으로 끄적끄적 스케치하거나 아이디어 정리를 하는 것만으로 알고 있어서 굳이 ‘과’가 설치돼야 할 필요성을 못 느꼈기 때문이다. 그러다가 드로잉전공 학생들과 함께 작품전에 참여한 적이 있는데 페인팅 전공생들보다 드로잉 전공생들의 작품이 훨씬 다양한 매체와 개념적인 작업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내가 알던 스케치북 드로잉은 아주 제한된 형태였던 것이다! 이러한 소소한 경험을 가진 내게 소마미술관은 드로잉의 본 개념을 정리해주어서 한편으로 희열감을 느꼈다. <내일전>은 2월 말까지고 사전예약은 필요 없다. 예술인 패스가 있으면 무료로 입장할 수 있으니 관심이 있는 분들은 방문해보면 좋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