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uture Is Now> 8.10 성남(광주대단지) 민권운동 50주년 기념전
성남큐브미술관 기획전시실 (경기도 성남시 분당구 성남대로 808 성남아트센터)
2021.7.23~8.22
매미가 찌르르 울고 햇빛이 땅을 말려버리듯 쏘아대는 그늘 없는 여름 어느 날 성남아트센터 안의 큐브미술관에 들렀다. 그곳에서는 8.10 광주 대단지 민권운동의 50주년을 기념하는 미술 전시가 열리고 있었다. 최근까지만 해도 광주 대단지 ‘사건’이라 명칭 되었던 이 일에 관련해서 예술가들이 저마다의 다양한 독자적 해석을 한 전시였다. 각 작가가 현재 성남과 광주 대단지 민권운동에 관해서 회화, 영상, 설치미술, 참여 미술 등으로 펼쳐 놓아 흥미로웠다. 이 사건을 요약하자면, 1970년대 성남의 중원구, 수정구 일대에 (당시 경기도 광주군) 정부가 서울시 판자촌 퇴거 주민들을 강제로 이주시키는 과정에서 개발지역 주민들이 정부의 행정에 항거하여 도시를 점거하고 격렬하게 항의한 민권운동이다. 미술관에는 이 일에 관한 것뿐만 아니라 현재 성남 도시공간 작업도 같이 전시되어있어 성남의 현재와 과거를 알아볼 수 있는 좋은 자료였다.
임흥순x신흥사진관, <성남 아카이브>
원형 평상, 인포그래프, 사진, 돌, 공구 아카이브, 화분, 2021
큐브미술관 3층에 도착하면 이런 식으로 공공기관 로비 같은 장소가 보인다. 이 미술관에 처음 방문했는데 이 전시 광경을 보고 약간 얼떨떨했다. 예전에 ‘양재시민의 숲’에 있는 윤봉길 의사 기념관에 갔을 때와 매우 비슷한 구성(?)이었기 때문이다. 양옆에 있는 유리 전시장과 널찍하게 떨어져 있는 중형 크기의 화분, 벽에 시간순으로 붙어있는 그래프가 공공기관이나 전시관 같이 보여 신기했다. 이곳에서는 서울시의 광주 대단지 계획에서부터 현재 성남 일대 재개발에 이르는 성남시 도시 형성 과정을 인포 그래프로 보여주고 이와 관련해서 수집된 자료를 아카이브 형식으로 보여준다. 벽면의 노란 띠 위아래로 신문 기사를 스크랩한 자료가 있는데 자세히 보면 왼쪽(1970년)에서 오른쪽(2020년)으로 갈수록 관련 기사가 적어지는 게 눈에 띈다.
김태헌, <금광1동 수인번호>
금광1동은 현재 재개발 단계에 있으며 2018년에는 주민들이 거의 떠나갔다고 한다. 김태헌 작가는 3월 말부터 지도를 들고 금광동의 가파른 골목길을 돌아다니며 사진을 찍었다고 한니 작가의 열정이 대단하다. 금광1동 재개발 단지에 있는 빌라에, 락카 스프레이로 쓰인 철거확인 표시(숫자)를 하나하나 찍어 현수막으로 프린트한 작품이 중심적이다.
‘집으로 돌아온 나는 철거표식으로 써놓은 구번지 이미지를 가지고 며칠간 포토샵 작업을 했다. 작업을 끝내자 골목길도 없고, 나무도 없는 단순반복적인 패턴의 높고 거대한 벽이 나타났다. 숫자만 지워내면 벽돌로 만든 높은 빌딩이다. 재개발로 사람들이 복잡한 미로 속 낡은 주거공간을 탈출한 곳은 결국 하늘대신 머리에 이웃을 이고 살아갈 더 춥고 더 비싼 주거공간이다.’ 김태헌, 2021
실제 금광1동에서 수집한 창틀을 프레임으로 삼은 작품(두 번째 사진)은 막막하고 갑갑한 인상을 준다. 재개발로 사라진 주민들의 삶의 터전이 단순하게 숫자로 표시되어 벽돌처럼 위로 쌓이고, 결국 창문 밖에서 바라보는 이 가상의 벽돌 건물은 결국 또 다른 높고 고급스러운 아파트가 될 예정. 이전에 베를린에서 100년 된 아파트에 며칠 묵어보면서 사람들이 건물을 보존하려는 노력에 감탄하면서도, 나무가 삐걱거린다든지 엘리베이터가 없어서 무거운 짐을 들고 걸어 올라가야 한다든지 등 불편함을 느꼈다. 반면 우리나라에서는 구가옥을 허물고 그곳에 아파트를 새로 짓는 재개발이 무수히 이루어지고 있다. 길을 지날 때마다 그런 모습을 보며 여러 가지 생각이 들었다. 김태헌 작가의 <금광1동 수인번호>는 이 경험과 생각을 환기해주는 좋은 작업이다.
임흥순x신흥사진관, <공중정원>
스티로폼 조각, 와이어, 화분, 선풍기 등 2021
이 전시공간은 경사가 심한 태평동 일대를 모티브로 삼는다. 작가들에 의하면 구불구불하고 복잡하게 드러난 전선과 각 주택에서 키우는 화분을 태평동의 특징 지을 수 있다고 한다. 와이어가 특정한 모양의 지도를 형상화하면서 과거와 현재의 성남이 서로 이어지고 공존하는 모습, 광주 대단지 사건의 과거와 미래 풍경이 층위로 드러나는 구조를 형상화한 작품이다. 해당 작품에는 태평동 주민들에게 기증받은 화분이 걸려있다. 전시가 진행되면 될수록 화분이 더 많아질 예정이라고 한다. 우리에게 정원은 마음의 안정을 취하는 곳이자 사색하는 장소이기도 하다. 그런 상징성을 가진 정원을 이렇게 고요하고 몽상적인 방법으로 표현하는 것이 재미있었다.
‘성공적인 분양을 기원드립니다’
신흥사진관, <하이힐즈 분양관>
사각 평상, 텍스트, 모니터, 오디오, 점토위에 아파트 조형물, 캐비닛, 사진, 벽지 등, 2021
이곳은 신도시의 아파트 분양관을 연상시키는 가상의 공간을 만든 작품이다. 흔히 볼 수 있는 아파트 홍보물-전단, 조감도, 입체조형물-의 형식을 따와 이 공간에 전시해놓았다. 그뿐만 아니라 이 장소에서 관람객들은 가상의 계약서를 작성해서 집을 분양받을 수 있어, 참여 미술의 형식도 띠고 있다. 결국 이 작품으로 집 장만에 대한 꿈을 제시하는 것이다. 하지만 합성된 포스터와 아파트 홍보 문구들을 보고 있으니 무분별한 아파트 건설에 대해 약간은 회의적으로 바라보는 것 같다는 느낌을 받았다. 요즈음 집값이 나날이 오르면서 아파트 장만은 더욱 힘들어지는 추세다. 전에 친구와 서울 남산타워에 있는 카페에 가서 얘기를 나눈 적이 있다. ‘저 조그만 창문 구멍 하나가 몇 억이라니’, ‘ㅋㅋ나한테 저 구멍 하나만 줘라’.
임흥순, <고향>
2채널 비디오, 4채널 사운드, 천막형 스크린 및 조명 설치, 31분 30초, 2021
두 개의 스크린을 포개어 놓은 이 작품은 광주 대단지 조성 당시 만들어졌던 군용천막을 형상화한다. 각 스크린은 다른 방식으로 성남에 관해 이야기하는데, 스크린 A는 성남시민이자 다양한 분야의 전문가들이 성남의 역사를 재조명하며 스크린 B는 태평동을 배경으로, 미술 작가 성능경의 퍼포먼스를 보여준다. 스크린 A에서 다양한 사람들이 각자의 성남에 대한 일화를 풀어내고 이를 공유한다.
중학생 때 성남시가 서울의 위성도시라고 배우긴 했으나 어떠한 연유와 방식으로 일이 이루어진 지는 배우지 않았다. 또한 대학 시절을 제외하고는 평생을 성남시에서 살았지만, 대단지 사건에 대해 잘 몰랐다. 각 파트에 있는 도슨트들이 역사와 작품에 대해 하나하나 설명해주어서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되었다. 이 전시는 대단지 사건을 다룰 뿐만 아니라 작가들의 성남의 과거, 현재, 미래에 대한 내용을 담았기 때문에 성남에 대한 지식의 폭이 넓어지는 느낌이 들었다. 한편으로, <Future Is Now> 전시회는 어느 한 장르에 국한해서 이야기를 풀어내는 게 아니라 다양한 미술 갈래를 통해 성남의 모습을 보여주었기 때문에 여운이 남았다. 위 작품 외에도 더 규모가 크고 멋진 작품들이 많다. 관심 있는 분들은 시간 날 때 들러보면 좋을 것이다.
<호민과 재환>
서울시립미술관 서소문 본관 (서울특별시 중구 덕수궁길 61)
2021.5.18.~8.1
© 포스트24
요즘 가장 핫하다는 전시 <호민과 재환>전에 다녀왔다. ‘호민‘은 한국전통 신화를 배경으로 하는 『신과 함께』 를 그려낸 유명한 웹툰 작가 주호민이고, ’재환‘은 주호민의 아버지이자, 한국 미술계의 대표적인 원로작가인 주재환 화백이다. 『신과 함께』 의 팬으로서 전시를 꼭 보고 싶었는데 인기가 얼마나 많은지 주말에는 예약이 다 찼으며, 평일에도 전시장에는 관람객이 많았다. 특히 서울 중심에 있는 시립미술관에서 열린 전시라서 그런지 현대미술을 좋아하는 사람뿐만 아니라 근처 직장인들도 많이 눈에 띄었다. 특이하게도 보통 무표정인 관람객들이 기분 좋게 피식거리거나 미소를 지으며 작품을 감상하고 있었다. 이유가 뭐였을까? 웹툰 『신과 함께』 를 보면, 이곳저곳에 개그적 요소들이 섞여 있는데 이 때문에 나는 주호민 작가가 매우 위트있는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시립미술관에서 주재환 작가의 작품을 보고 나서는 그런 재치가 아버지의 것과 닮았다는 것을 바로 깨닫게 되었다. 두 작가 모두 솔직하면서 유쾌한, 그리고 통찰력 있는 작품을 그린다는 점이 가장 닮은 듯하다. 작품 외적으로는 그림들이 간단한 듯 보이지만, 속을 살펴보면 사람들의 마음을 끌어당기고 감동도 일으키는 점이 재미있었다. 주호민 작가가 웹툰으로 이야기를 풀어낸다면, 주재환 작가는 작품 한 점에 이야기를 응축해 짧은 하이쿠 시처럼 보여준다. 이러한 특징 때문에 보통 무덤덤한 표정을 짓는 관람객들이 살짝 웃음을 보인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호민 초상> 2020 (왼쪽) 과<주재환 초상> 2021 (오른쪽)
© 포스트24
관람객을 반갑게 맞이하는 서로를 그린 초상화.
<호민과 재환> 전시의 시작을 알리는 재치있는 작품들이다.
주재환, <훔친 수건>, 2012, 캔버스에 아크릴과 수건 콜라쥬, 66 x 53cm
© 포스트24
훔친 돈이 전혀 없는 투명사회에서
사우나의 도난방지용 훔친수건을 훔친 딸을 혼냈더니
훔친 기억이 없다고 하네
주재환, <정신해방 01>, 2017, 유화 유리액자.
이 작품이 성공한 이유
무엇을 그렸는지 볼 수 없어
호기심을 자극하니까
주재환, <귀찮아>, 2020(1998), 집게, 크레용, 종이, 95 x 74cm
귀찮아
보고
듣고
말하고
생각하는게
실제 수건을 걸어놓거나, 예전에 쓰던 캔버스를 뒤집어 놓는다든가, 간략한 드로잉에 집게를 이리저리 꼽아놓는다든지, 이야기를 풀어내는 방식도 다양하고 표현도 다양하다. 분명히 느껴지는 것은 작품들이 일상적이고 회화가 가지려는 권위로부터 비켜 가 있다는 점이다. 그림과 문구가 한 곳에 같이 있는 방식 말고도 다른 여러 가지 형태가 있지만 나는 이러한 만화 같으면서 시화적인 분위기가 마음에 들었다. 순간순간 떠오른 일상적이고 사소한 생각을 하루 동안 품고 있다가 작업으로 표현한 느낌이랄까. 사람들이 주재환 작가의 작품을 흥미롭게 여기는 점이 바로 짧은 글과 간단한 그림이 평면이 아니라, 2.5차원 혹은 3차원 입체로 발현돼서 좋아하는 것 같다.
▲주재환, <물vs물의 사생아들>,
알루미늄 빨래대, 각종 음료수 제품, 드링크 제품, 가변설치, 2005
주재환 작가는 위와 같은 방식 말고도 버려진 재활용 쓰레기를 모아 재창조해서 새로운 이야기를 더하기도 했다. 작품의 제목 또한 매우 유쾌하다. 단순히 빨래 건조대에 다 마신 음료수를 걸어 놨을 뿐인데 제목 덕분에 스토리텔링이 가능해졌다. 건조대 사이사이에 뚝 뚝 떨어져야 할 물방울 대신 음료수병이 걸려있는 걸까? 유쾌한 변신이지만 오히려 역설적으로 환경 오염에 관해 이야기하는 것 같기도 하다.
▲ 미술관 3층. 주호민 작가와 주재환 작가의 작품들이 한 벽면을 차지하고 있다. © 포스트24
전시장에서는 작품을 크게 주재환, 주호민 작가로 각각 파트를 나눠놓기도 했지만 이렇게 콜라보레이션 분위기로 전시된 것도 있었다. ‘주’ 부자의 작품이 서로 엮여서 더욱 재미있는 모습을 자아낸다. 두 작가 모두 한국의 전통 무속신앙에 관심이 있다고 한다. 걸린 주재환 작가의 그림은 도깨비 등 우리나라의 옛이야기와 신화, 불교적 세계관을 담고 있다. 주호민 작가의 칸 만화와 벽면에 그려진 형상 또한 한국의 저승관을 보여주고 있다. 벽면에 넓게 디스플레이 되어 있어서 그런지 K-전통, 대중문화가 한 면에 화합된, 일정한 연대기를 가진 현대미술 같이 보였다.
▲주호민, 『무한동력1』(2008) 중 <꿈이 뭔가?> © 포스트24
주호민 작가의 웹툰을 대학교 1학년 때 처음 보기 시작했다. 화려한 그림체는 아니었지만 털털하게 이야기를 이어나가는 게 흥미로워서 『짬』, 『무한동력』, 『신과 함께』까지 정주행했었다. 당시에 봤던 장면이 운 좋게 판넬에 전시되어 있었다. 그때는 대사 하나하나가 별로 깊게 와 닿지 않았고 크게 기억에 남지 않았는데, 다시 보니 무슨 얘기를 하려고 했는지 금방 알 것 같다.
“회사에 들어가면 자네의 꿈이 이루어지는 건가?”
“음.. 그때는 또 다른 꿈이 생기겠죠.“
“그런 건 ‘꿈’이라기보다는 ‘계획’이라고 한다네. 그 계획조차도 스스로 짠 게 아닐
것이네.“
“.. 그럼 뭐가 꿈이죠?“
“어렸을 때 어른들이 그런 질문을 하지. 넌 이다음에 커서 뭐가 되고 싶냐고. 그때
자네가 했던 대답이 대기업 직원은 분명 아니었을 거란 말야.“
“하하. 그건 그렇죠. 공무원도 분명 아니고요.“
…
“그런데, 꿈이 밥을 주진 않잖아요.“
”자네에게 필요한 건 밥이 아니야. 죽기 전에 못 먹은 밥이 생각나겠는가,
아니면 못 이룬 꿈이 생각나겠는가?“
주호민 작가의 『신과 함께』 는 1부 저승편, 2부 이승편, 그리고 3부 신화편으로 이루어져 있다. 각각 작품들은 저승과 이승을 넘나들며 서로 유기적으로 이어져 있다. 1에서 3부까지의 주요 등장인물은 서로 인연이 깊어 한편으로는 과거를 공유하기도 한다. 필자가 이야기를 알려주면 재미없으니 웹툰이나 단행본으로 내용을 찾아보면 좋을 것 같다.
▲주호민, 『만화전쟁』 (2015) 중 <1화 두 어시>. © 포스트24
이 작품은 주호민 작가가 파주에 살 때 북한에 전단지를 넘기는 정책을 보고 자신의 만화가 북한으로 넘어가면 어떻게 될지를 상상해서 만들어낸 작품이다. 만화의 등장인물 진기한은 주호민 작가 작품에 연속해서 등장한다. 진기한이 만나는 여러 인물은 우리가 주위에서 쉽게 볼 수 있는 보통사람이다. 주호민 웹툰의 특징은, 드라마나 영화처럼 갑작스럽게 내용을 전개하지 않고, 이야기 층위가 유기적으로 직조되어서 전체적인 스토리의 완성도가 탄탄하다는 점이다. 이러한 특징들 때문에 주호민 작가의 웹툰이 대중에게 많은 공감과 재미를 불러일으킨 것이 아닌가 생각이 든다.
웹툰과 현대미술. 장르로 치면 매우 다른 갈래지만 두 작가가 공통적으로 가진 단순해 보이는 유쾌함이 그림과 작품에 자연스레 녹아있었다. 전시 작품도 많고 내용도 자세히 담고 있어서 시간 가는 줄 모를 정도였다. 특히 주호민 작가의 팬이라면 이 전시를 정말 추천하고 싶은데 그 이유는 작가의 콘티, 스케치 등 러프한 작업도 같이 전시되어 있기 때문이다. <호민과 재환> 전은 8월 1일까지 전시하고, 현재는 코로나 시국 때문에 입장하려면 예약을 해야 하니까 관람하고 싶으신 분들은 시간이 있을 때 한번 방문하면 좋을 것이다.
시대의 얼굴, 셰익스피어에서 에드 시런까지
국립중앙박물관 특별전시실(서울특별시 용산구 서빙고동 서빙고로 137) 2021.4.29 - 8.15
유럽 곳곳에 있는 유명한 미술관이나 박물관에 가면 역사적 인물의 멋들어진 초상화를 쉽게 찾아볼 수 있다. 하지만 전시장에 들어선 초반에는 탁월한 얼굴 묘사와 화려한 액자에 놀라다가도 그림을 몇 점 보고 나면 금세 지루해지기 일쑤였다. 왜냐하면 옛 초상화는 궁정화가에 의해 그려진 정형화된 화법이 많은데 인상주의나 현대미술에 관심이 많은 나에게는 그다지 재미가 없었기 때문이다. 당대에 유명했다고는 해도, 나에게는 화가의 이름이 익숙한 것도 아니며 그려진 사람이 누구인지, 어떤 이야기를 담고 있는지 등 그림 내면의 이야기가 부족해 보였기 때문이다. 그러한 이유로 런던 유학 시절에도 국립 초상화 박물관보다는 테이트 모던이나 여타 유명한 현대미술관에 더 많이 갔다. 이따금 테이트 브리튼 (Tate Britain) 미술관에 가서 고전적인 그림을 보기는 했으나 전시장 안에서 발걸음이 빨라지는 건 어쩔 수가 없었다. 영국과 환경이 다른 우리나라에서, 그것도 국립중앙박물관에서 영국 초상화전을 한다고 하길래 과연 지금까지와는 다른 경험을 할 수 있을까 생각해서 가봤더니 이전 나의 기억들과는 다르게 그림들이 ‘시대’가 아닌 ‘주제’로 묶여있었다. 전시는 총 5개의 주제 <명성, 권력, 사랑과 상실, 혁신, 정체성>으로 구성되어 있다.
윌리엄 셰익스피어 존 테일러 (John Taylor), 1600~1610년 경, 캔버스에 유채
전시의 첫 번째 장은 초상화와 ‘명성’에 관한 것이었다. 아무래도 당시 초상화 모델이라고 하면 어느 정도 유명했을 거고 어떤 성취가 있었기 때문에 화가들이 그렸을 것이다. 전시설명문에 따르면, 영국 국립초상화미술관 설립자들은 ‘명성의 전당’을 꿈꿨으며 그림 주인공의 명성이 작품의 예술적 성취나 화가의 위대함에 우선하는 가치였다고 한다. 흥미로운 건 그들이 가장 먼저 입수한 작품이 윌리엄 셰익스피어의 초상화였다는 것이다. 왕족 혹은 귀족이 아니라, 본인의 탁월한 능력으로 세상에 이름을 떨친 인물을 우선시했다는 점, 그리고 이들을 모아놓아 자국 문화를 기념하려고 했던 게 초상화미술관의 설립 취지라고 생각했다.
에드 시런 콜린 데이비슨 (Colin H Davidson), 2016, 린넨에 유채
에드 시런은 영국 가수인데 한국에서는 <Shape of you>라는 곡으로 잘 알려져 있다. 셰익스피어에서부터 에드 시런까지, 시대의 흐름에 따른 문화의 새로운 아이콘을 포함하려는 영국 초상화미술관의 노력이 담겨있는 듯하다. 개인적으로 동시대인을 옛 초상화 형식으로 그린 작품은 자주 접해본 적이 없어서 이 그림은 특히 흥미로웠다. 푸른빛으로 맑게 그려진 에드 시런의 눈과 유자빛 수염이 적절히 잘 어울렸고, 진지한 표정에서 그의 음악적 고민을 읽어낼 수 있었다.
찰스 1세 헤릿 반 혼트호르스트 (Gerard van Honthorst), 1628, 캔버스에 유채
이 작품은 2장, 권력에 관한 초상화이다. 설명을 보기 전에는 유명한 작가나 그냥 귀족이라고 생각했는데 알고 보니 잉글랜드를 통치했던 찰스 1세 국왕이었다. 왕족이라 하면 일반적으로 눈빛이 강렬하거나 위엄있게 보이려고 배경을 어둡게 하고 온갖 반짝이는 액세서리와 장치로 권력과 그 분위기를 표현하는 작품이 많은데, 이와는 대조적으로 국왕이 일상적인 느낌과 부드러운 모습으로 그려졌다는 게 놀라웠다. 그림을 자세히 보면 피부 결, 머리카락, 눈빛, 손가락의 붓칠이 아기 다루듯 섬세하게 남아있다. 하지만 당대 최고의 화가에 의해 그려졌다는 점과 흔히 볼 수 없는 고급스러운 옷을 입고 있다는 점이 찰스 1세의 권위를 나타내는 듯하다.
애나 윈터 알렉스 카츠 (Alex Katz), 2009, 린넨에 유채
애나 윈터는 영화 <악마는 프라다를 입는다>의 실제 주인공이자, 미국 잡지 <보그>의 편집장이다. 저명한 미국의 화가 알렉스 카츠에 의해 독특한 표현 양식으로 그려진 애나 윈터의 초상화는 패션계 안에서 그녀의 권력과 능력의 우수함을 내비치는 것 같다. 따뜻하면서도 강한 노란색 배경 안의 애나 윈터는 건조하면서도 나긋한 미소를 짓고 있다. 크게 화려할 것 없이 단아한 목걸이와 의상을 걸치고 있지만 애나 윈터의 당당함과 개성이 돋보이는 작품이다.
자하 하디드 마이클 크레이그 마틴(Michael Craig-Martin), 2008년, 통합 소프트웨어가 설치된 벽걸이 LCD 스크린
사진 발명 이후로 정확하게 인물을 묘사해야 한다는 틀에서 벗어나게 된 화가들은 초상화에 인물의 외적인 것보다 내적인 것, 본질에 더 다가갈 기회를 얻었다. 더욱이 예술가들은 사실적으로 그리는 것만이 아니라, 판화, 조소 등 여러 가지 방식으로 인물의 초상을 제작할 수 있게 되었다. 위 작품은 네 번째 주제, ‘혁신, 진화하는 초상화’에 걸린 영국 개념 미술 작가 마이클 크레이그 마틴의 작품이다. 모델이 된 자하 하디드는 곡선의 여왕이라 일컬어지는 이라크 출신 건축가다. 그녀는 서울 동대문 디자인 플라자를 설계했고 홍콩, 영국, 미국 등 전 세계 곳곳에 기하학적인 곡선형 건축물을 설계했다. 자하 하디드의 끊임없이 변화를 추구하는 모습과 유동적 형태의 건축물 특징에 영감을 받은 마이클 크레이그 마틴은 LCD 모니터를 캔버스 삼고 컴퓨터 소프트웨어를 이용해 자하 하디드의 창의적 면모를 표현하였다. 예컨대, 작품에서 고정된 선(드로잉)을 제외하고, 색상은 프로그램에 의해서 무작위로 선택되고 계속해서 바뀐다. 사진을 찍는 순간에도 미묘하게 색이 바뀌어서 흥미로웠다.
찰리와 함께한 자화상 데이비드 호크니(David Hockney), 2005, 캔버스에 유채
전시의 다섯 번째 주제는 ‘정체성과 자화상’이다. 데이비드 호크니는 영국에서 손꼽히는 현대 미술가다. 페인팅 이외에도 판화, 디지털화 등 여러 가지 방면으로 작업을 하고 있다. 서울시립미술관(2019)에서 ‘데이비드 호크니’ 전시 개최를 계기로 한국에서도 팬층이 두둑해졌다. 거의 실제 크기로 제작된 이 작품에는 호크니와 그의 큐레이터 친구 찰스 데어가 같이 등장한다. 맨 뒤에 있는 인물, 중간에서 약간 앞에 있는 호크니, 그리고 맨 앞의 대형 캔버스가 말하듯, 세로로 된 긴 그림에서 원근감과 그의 생기 넘치는 색상 선택, 그리고 재치 있는 인물 표현이 두드러진다. 필자는 호크니의 생동감 넘치는 표정이 공감 가는데, 그 이유는 나도 그림을 그릴 때 보통 눈동자만 살짝 움직이고 입은 꾹 다문 채로 그리기 때문이다. 과거의 내가 자화상을 그릴 때는 카메라로 찍은 후에 그걸 재현하는 방식이었는데, 호크니는 거울을 보며 바로바로 그려내는 방식이라 순간순간의 생동감이 느껴져서 재미있다.
전시를 보기 전에는 ‘아, 이거 런던에 있는 흔해 빠진 초상화 전시 아닌가?’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이 전시에서는 작품들을 다섯 가지 큰 주제의 흐름에 맞춰 감상할 수 있어 좋았다. 또한 그림마다 인물에 대한 설명과 의의를 덧붙여 놔서 그림을 이해하는데 매우 도움이 되었다. 결과적으로는 지금까지와는 다른, 더 정성이 들어간 초상화 전시를 경험했던 것 같다. 전시장에는 역사적 인물뿐만 아니라 알렉스 카츠, 데이비드 호크니 등 현대미술가의 작품도 포함되어 있어서 너무 지루하지도, 따라가기 힘들지도 않았다. 작품전시는 국립중앙박물관에서 8월 15일까지 열리고 전시실 바로 옆에는 관련 굿즈와 서적을 판매하고 있어서 시간 내어 간다면 재미있고 알찬 경험을 할 수 있을 것이다.